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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시오 14살, 여름] 비밀 이야기플로렌시오 로그/개인 로그 2023. 8. 8. 22:59
이건 비밀이야.
그래서 말하지는 않을거지만.
'좋아하는 건 많고, 싫어하는 건 딱히 없어요.'
나는 그걸 내가 가진 큰 장점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걸 장점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 그걸 장점이라고 소개할 때마다 어른들은 대견하다는 얼굴을 했고, 또래 친구들은 부럽다거나 못 믿겠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였지.
그래, 맞아.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싫어하는 건 없고, 좋아하는 건 많아. 왜냐면 다른 누군가가 무언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로 삼았거든.
토마토의 향기, 아보카도의 식감, 춥고 더운 것. 나한테는 모두가 견딜만한 것이거나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거니까. 하지만 뭘 봐도 아무 생각이 안 든다고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는 좋아함이 낫잖아? 맞아, 나는 경매에 낼 물건 같은 건 없었어. 너희들에게서 받은 물건은, 정말 소중한 물건이지만... 정작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너희들에게 주어도 좋을 정도로 소중한 물건은 없었거든.
있잖아, 나, 어릴 적에는 말이야. 엄청 이상한 애라는 소리를 들었어.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고. 그런 주제에 어른들 말은 잘 들어서 꺼림칙한데 착한 애였어. 그래서 부모님이 날 데리고 엄청 이사를 많이 다니셨거든. 그러다 큰 도시의 신전에 갈 일이 있었어. 그 때가 마침 큰 예배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었거든. 그 때 처음 봤었어, 성가대를.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신님을 찬양했지. 미리 말해두지만, 여신님이 되고 싶었다는 게 아냐.그 때의 나는 성가대가 스스로 반짝인다고 생각했어. 이상한 애라도 애긴 애였나봐. 맨 앞에 선 사람이 단독으로 노래하는데, 그 위로 조명이 쏟아졌지. 장식이 반짝이고 성가대의 하얀 가운이 흰 오로라처럼 흔들리고 있었어. 나는 무언가를 엄청 원한 적도 없고, 무언가를 엄청 증오한 적도 없어. 그럴 일이 없었어. 하지만 그 때만큼은, 정말로 그 자리에 서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내가 성가대가 되고 싶나보다! 라고 생각했었지. 실제로도 그 땐 그랬을지도 몰라.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더 쉬웠어. 나한테 이게 좋으냐, 저게 싫으냐고 물어도 나는 잘 모르겠더라구. 나는 차라리 규칙이나, 법률이나, 윤리 같은... 기준이나 근거가 명확한 이야기가 더 쉽더라.
그러다가, 한 번은 말이야. 매번 노래 잘 부르기로는 나랑 1, 2등을 다투던 여자애랑 싸운 적이 있었어. 정확히는 그 애가 날 일방적으로 싫어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 애랑 단 둘이 남았을 때, 걔가 대뜸 날 때리기 시작하는거야... 놀라긴 했어. 진짜로. 그런데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애매하기도 해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안 듣더라고. 나만 없으면 자기가 1등이라는 둥, 양보 좀 해주면 안되냐는 둥. 그런 이야기도 들었어. 지금이라면, 어쩌면, 대답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의 나는 그런 마음을 잘 몰랐거든. 그래서 그 애한테,
"내가 왜 그래야 해?"
라고 물었었어. 나는 내가 잘하는 걸 하고 있고, 그 애도 잘하는 걸 하고 있으니까. 서로 다투는 건 당연하지. 그러다 좀 더 잘한 쪽이 이기는 거고. 하지만 그 애는 좀 달랐던거야.
"넌 맨날! 맨날 그런 식으로 날 보잖아! 뭐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이기고! 기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져서 분해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늘, 늘, 진심인데!"
맞아. 그 때의 나는 그 애가 내 앞에서 죽었어도 울지 않았을거야. 부모님을 빼고 다른 어른들이나 친구들도 날 매번 착한 아이라고 했는데, 그 애가 처음으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날 알아본 거였지. 엄청 맞았어, 그 때. 그날 생겼던 멍이 한 일주일은 안 빠졌을걸. 그런데도 나는 그 애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진 않았어. 그럴 이유가 없었잖아. 날 때리긴 했지만, 그 애 기준으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아픈 거야 언젠가 나으니까.
져줄까? 라고 물었더니 그건 또 싫다고 소리지르는거야. 그게 정말 신기했어. 맞아. 나는 그 애를 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됐어. 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런데도 상대가 일방적으로 져주는 건 싫은 마음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상대를 보고 혼자 화내는 마음도. 그게 너무 신기하고, 또 마음에 걸려서, 그 고민을 하다가 그 다음 합창 평가를 말아먹어버리는 바람에 진짜로 지기도 했고. 덕분에 연말 예배는 그 애가 맨 앞에 섰었어.
그 때, 생각했거든. 역시 우는 거나 화내는 것보다는, 웃고 기뻐하는 게 낫겠구나, 하고. 누군가가 가장 반짝이는 자리에 서서 기쁜 얼굴로 웃는 걸 보는 건 좋더라. 그렇다고 그 뒤로 걔한테 져줬단 소린 아니지만. 그 애는 연말 예배 이후에 이사를 갔고, 나는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어. 아마 지금 부르면 전혀 다른 노래가 될테고, 그 때 같은 목소리로 부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마이너스가 준 마도구에는 한 소절도 녹음할 수 없었지만, 나는 친구들이 해준 걱정을 기억하고 있어. 이젠 노래하지 않는거냐고 조심스레 염려해주는 것도, 카펠라로 간 이유를 조용히 물어보는 목소리도. 전부 기억하고 있어. 조금 슬프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리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냥, 그랬어.
그러니까, 나, 노래는 그만하려고. 예전 같은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으니까 그만두는 게 아냐. 노래를 포기한 것도 아니야. 노래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내게 의미가 없어져서인 것도 아니니까. 나는 노래 말고도,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보고 싶어.
이건 비밀이야, 정말로 부끄러운 비밀이라서, 너희들한테는 말하지 않을거지만.
불꽃이 지나간 이후의 밤하늘은 바다와 같이 짙은색으로 조용했다. 플로렌시오는 머리에 쓰고 있던 머리띠를 끌어내리고, 안경을 벗었다. 밀짚모자까지 벗어서 손에 들자, 밤이 되어 조금은 서늘해진 바람이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있나요?'
'진정 바라는 것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스텔라'가 되었는가.'
원석에서 잡석을 떨어내가며 연마하듯이, 단단한 씨앗에서부터 새싹이 돋아 나무가 되듯이, 눈비가 내리고 강이 흘러 바다가 되듯이. 사람의 성질마저도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으며, 많은 것이 변해간다. 플로렌시오도 아카데미에서 몇 년을 지내며 변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과, 변해서 좋았다는 자신을 알아갔다.
'나는 차라리 성가대보다는 광대를 하는 게 어울릴지도 몰라. 그냥, 누군가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았으니까.'
플로렌시오는 엷게 미소했다. 먼 미래의 일은 알지 못하더라도, 당장 자기 자신의 모습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안개의 가운데에서도 정말로 새롭게 하고 싶은 것이 생긴다는 게 기뻤다.
"나, 아카데미에 오길 잘한 것 같아."
플로렌시오는 누가 들어도, 듣지 못해도 좋을 말을 바람결에 흘려보냈다.'플로렌시오 로그 > 개인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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