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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하얀 편지, 옐레나 일디즈에게.플로렌시오 로그/16살이 16살에게. 2023. 9. 12. 00:47
(*해당 편지는 플로렌시오가 16살 겨울방학에 보낸 편지입니다. 답장은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고, 안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와 선물을 받아서 임의로 처분하셨다고 해도 괜찮으며 아예 안 읽었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 거다~ 에 대한 기록로그에 가까우므로 편지를 받은 이후의 부분은 완전히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날조 환영하며 17세 이후에 해당 편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내용은 뭐든 맞춰드립니다.)
(*중간중간의 옅은 글씨는 실제로도 좀 흐릿하게 쓴 것이 맞으며, 더러는 지웠거나(취소선)한 흔적이 보이는 글줄입니다.)
(*옐레나에게 보낸 편지는 꽤 고급품인 하얀 편지지입니다. 편지봉투도 같은 디자인입니다.)
(*옐레나에게 동봉한 선물은 '비냄새와 꽃향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향이 나는 고체 향수'입니다. 납작하고 작은 원통 안에 들어있어서 연고처럼 손에 덜어 바르게 되어있습니다. 겉포장과 향수통의 색깔이 옐레나의 머리색과 비슷한 하늘색입니다.)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악마, 옐레나 일디즈 귀하.
아부성 멘트 같은 수신인으로 시작하는 건 좀 그럴까 싶었지만 귀하께서는 이렇게 불리는 걸 기뻐하실 것 같아 그대로 적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사실 이 편지는 세 번 정도 새로 쓴 편지입니다. 앞에 썼던 두 장의 편지는 기껏해야 인삿말 밖에 못 쓰고 찢어버렸거든요. 그러니 귀하에게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보내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일단 모든 것에 앞서서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내가 옐레나를 피한 것처럼 느껴졌다면 정말로 미안해. 그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니, 어쩌면 그럴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나름대로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들켰다'는 생각이 들게 된 건 옐레나가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더라. 웃어야할지, 그냥 무표정해도 될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좀 지나고 나니까 옐레나는 역시 눈썰미가 좋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것도 남들 위에 서는 자질인걸까? 그런데 뭐랄까... 사과를 하기엔, 우리가 싸웠다고 표현할만한 일을 겪은 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싸웠다면 좀 달랐을까? 이상하다는 얼굴로 날 보지 말라고 말했었다면 싸웠을까? 지난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건 좋지 않다는데, 자꾸만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제대로 말 걸지 못하고 피해버린 것 같아. 비밀로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다른 친구들한테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나오지 않았다는 건 옐레나가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그것도 고마웠다고 말할게. 거창하진 않아도 나한테는 중요한 부분이었거든.
옐레나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확실한 편이지? 난 사실 그걸 잘 모르겠어. 싫어할만한 이유가 없고, 좋아할만한 이유는 많으니까. 나한테는 그래. 그래서 옐레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 좀 이상한 표정이었지? 어쩌면 그 때 내 얼굴을 보고 더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놀라게 한 거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으려고 해. 많이 생각했거든.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만큼, 다른 사람도 나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고 한다면 내가 옐레나를 지켜보는만큼 옐레나도 나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그러니까 옐레나가 나에 대해서 알아차린 건 자연스러운 흐름인거겠지.
나는 내 이런 기질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이상하게 보일 수는 있다고 생각해. 옐레나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도 나라고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옐레나가 나에 대해 알아차렸던 것 때문이라고 하면 믿어줄래? 나는 분명히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전부 나니까. 옐레나는 어쩌면 내가 앞으로도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게 싫어한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지 않겠어? 싫어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지만, 이왕이면 그런 나도 친구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옐레나가 나를 앞으로도 계속 친구라고 여겨줄 수 있다면, 옐레나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을래? 옐레나가 나를 보면서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나도 옐레나를 이해해보고 싶어졌거든. 그 때 일에 대한 복수도 겸해서, 옐레나도 나한테 비밀 하나 정도는 들켜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다른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비해서 엄청 두서없고, 정리도 안되는 것 같지만... 이런 편지도 보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따로 정서하지 않은 채로 편지를 보내. 하지만 선물을 빼놓는 건 아니니까. 같이 보낸 소포에는 고체 향수가 들어있어. 고체니까 향'수'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그냥 그렇게 팔더라. 향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새벽에 핀 꽃향기처럼 비냄새와 꽃향기가 같이 섞인 향이 있어서 그걸로 보내. 향보다도, 사실 패키지가 옐레나의 머리색이랑 비슷한 색이라서 고른거라 향 자체가 마음에 들지는 잘 모르겠다. 역시 개학하면 옐레나에 대해서 좀 더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악마들은 대부분 추위에 약한 것 같아보였는데, 옐레나도 감기 조심해.
답장 줄 수 있으면 주고 아니어도 괜찮아. 개학 때 만나자.
새벽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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