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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 봉투에 담긴 편지, 에녹에게.
    플로렌시오 로그/16살이 16살에게. 2023. 9. 11. 23:41

    (*해당 편지는 플로렌시오가 16살 겨울방학에 보낸 편지입니다. 답장은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고, 안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와 선물을 받아서 임의로 처분하셨다고 해도 괜찮으며 아예 안 읽었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 거다~ 에 대한 기록로그에 가까우므로 편지를 받은 이후의 부분은 완전히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날조 환영하며 17세 이후에 해당 편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내용은 뭐든 맞춰드립니다.)

    (*중간중간의 옅은 글씨는 실제로도 좀 흐릿하게 쓴 것이 맞으며, 더러는 지웠거나(취소선)한 흔적이 보이는 글줄입니다.)

    (*에녹에게 보낸 편지는 경전 필사에 흔히 쓰이는 하얀 종이입니다. 애초에 편지지 세트가 아니라서 봉투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하얀 봉투에 넣어 발송하였습니다.)

    (*에녹에게 동봉한 선물은 '하얀 깃털이 달린 깃펜'입니다. 신전 사제들이 주로 사용하는 깃펜으로, 오래 필기해도 필기감이 달라지지 않고 잉크가 일정하게 나와서 품질이 좋다고 소문난 깃펜입니다.)

     

     

    언제나 여신님께 신실한, 에녹 귀하.

     

    귀하에 대해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신전이나, 귀하의 방이 함께 떠오릅니다. 그래서인지 신전을 지나갈 때, 여신님에 관련된 상징물이 있는 곳에 갈 때, 혹은 낮고 어두운 곳을 향할 때 귀하의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듯이, 여신께서는 낮고 어두운 곳에 임하시기 때문이겠지요. 경전의 옛 판본에서는 결국 손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은 심장에서부터 가장 먼 곳이니 여신님의 손길 또한 그러하다고 적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편지는 종교적인 토론을 하고 싶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고, 친구인 에녹에게 보낼 뿐인 편지니까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할까요? 한 줄로 요약하자면 여신님에 대해서 생각하면 귀하가 생각난다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제가 보냈던 편지들, 지금 쓰는 편지, 그리고 앞으로 쓸 편지들을 전부 합쳐도 이 문장만큼 귀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에녹이 늘 한결같았다는 소리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이제 친구들 중엔 모르는 사람도 없을테고.

    이 편지를 보내기 좀 전이었습니다. 이상현상이 발생한 지역을 지나갈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 있던 오래된 부조가 망가진 것을 복구하는 데에 힘을 보탠 적이 있습니다. 굳이 이 내용을 쓰고 있다는 것에서 어렵지 않게 예상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신님을 나타난 부조였지요. 신전에 안치되는 아름다운 대리석이 아니라 어디에나 흔히 있을법한 회색 바위에 여신님의 형상을 새긴 것일 뿐이라 비바람과 먼지에 닳은 모습은 오래된 석벽 같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한 때는 그 존재가 잊혀지는 바람에 여행자가 잠시 앉아서 쉬어가는 쉼터로 쓰이다가 다시 발견되었다나요.

    재차 인용하자면, 여신님께서는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임하시기 때문에 여신님의 모습이 조각된 부조조차도 길을 걷는 이들의 쉼터로 내어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꽤 유명해져서 길이 반듯하게 닦여있지만 예전에는 자갈과 풀로 제대로 된 길조차 없는 곳에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옛날에 부조를 남긴 예술가에게도 여신님의 계시가 임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구현장에 손을 보태다보니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여신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셨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뜻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이라는 생각이요. 이상현상으로 부조가 망가졌을 때는 그것 때문에 흉흉한 소문이 많이 돌았다고 합니다. 좀 극단적인 의견으로는 마을을 버리고 이주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몇 신실한 이들이 주도하고 목소리가 크고 행동력 좋은 이들이 밀어주어 부조는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지만 그 일들에 과연 여신님의 뜻만이 존재했을까요? 설령 여신님의 뜻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은 모두가 다를 것이고 부서진 채로 두는 것이 여신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일을 겪을 때면 오히려 여신님의 뜻이 실재함을 느끼는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사람의 의지가 그보다 강하다고 느낍니다. 귀하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요. 시대를 이끄는 것이 여신님의 뜻이라면 시대를 부수는 것은 사람들의 의지겠지요. 역사의 끝까지 마지막 스텔라로 불릴 우리가 그러하듯이요.

    감상에 빠지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상대가 드물다보니 귀하에게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만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의외성을 더해서 깃펜을 보내드립니다. 말이 쌓인다고 했으면서도 왜 깃펜을 선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절반의 이유는 어차피 개학하면 많이 이야기를 나눌텐데, 싶은 생각이 들어서고요.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여신님의 말씀은 말보다는 글로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귀하께서도 경전 필사를 즐겨하실테니, 혹시 필사 중에 경전에서 특히 마음에 드시거나 아름다운 문구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이왕이면 편지가 좋아. 편지에 같이 써줘.

    천사 친구들은 대부분 추위에 강한 편이라 걱정은 없지만, 귀하께서는 새벽부터 신전에 계시는 일이 많으니 보온에는 꼭 신경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은, 답장 주시지 않아도 개학 이후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천계, 어느 우체국 앞의 카페에서
    플로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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