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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 테두리가 둘러진 남색 편지봉투, 일리야 젠에게.
    플로렌시오 로그/16살이 16살에게. 2023. 9. 13. 04:58

    (*해당 편지는 플로렌시오가 16살 겨울방학에 보낸 편지입니다. 답장은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고, 안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와 선물을 받아서 임의로 처분하셨다고 해도 괜찮으며 아예 안 읽었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 거다~ 에 대한 기록로그에 가까우므로 편지를 받은 이후의 부분은 완전히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날조 환영하며 17세 이후에 해당 편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내용은 뭐든 맞춰드립니다.)

    (*중간중간의 옅은 글씨는 실제로도 좀 흐릿하게 쓴 것이 맞으며, 더러는 지웠거나(취소선)한 흔적이 보이는 글줄입니다.)

    (*일리야에게 보낸 편지는 짙은 남색 줄이 들어간 하얀 편지지입니다. 편지봉투는 반대로 짙은 남색 바탕에 하얀 테두리가 둘러진 디자인입니다.)

    (*일리야에게 동봉한 선물은 '서로 길이가 다른 얇고 반투명한 파란색 천'입니다. 커튼이나 캐노피로 쓰이는 천이며, 여러겹으로 되어있는데다 아랫단에 하얀색으로 물을 들여 파도를 묘사했다는 것이 한눈에도 티나는 물건입니다.)

     

     

    진주너울의 일리야 젠 귀하.

     

    귀하께만 살짝 고백하는거지만, 저는 마을을 나오기 전까지 바다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직접 본 적도 없고, 책이나 다른 사람의 말로 알고는 있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지요. 물이 많다는 것, 짜다는 것, 넓다는 것, 푸르다는 것, 이따금 큰 물결이 생긴다는 것. 호수를 가리키면서 저 정도면 바다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물어도 바다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 정도가 아니라고 했었죠. 어릴적의 제게는 그 호수만큼 커다랗고 깊은 물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마을을 나와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을 때는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푸른색에 삼켜질 것만 같았거든요. 귀하께서는 이 느낌을 잘 이해하지 못하실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바다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좋아하는 걸 남이 모른다고 했을 때 묘하게 서운한 거... 일리야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상상은 잘 안간다 싶은데 그런 일이 아예 없을 것 같지는 않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용계를 가든, 혹은 다른 곳으로 가든 바닷가를 지나거나 굳이 배를 타고 움직이는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모래사장이나 자갈해변을 걸으며 느끼는 바다와, 방파제 근처를 지나며 볼 수 있는 바다와, 직접 배를 타고 수면을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바다는 모두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바다를 궁금해하는 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을 하고 싶다고도, 편지를 쓰고 싶다고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었겠죠. 저는 그것이 기쁩니다. 이전에 귀하에게 저는 분홍색보다 파란색을 좀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실까요? 저는 늘 깨달음이 느린 편이라 귀하와 그런 말을 나누기 전까지는 제가 분홍색과 파란색을 둘 다 평등하게 좋아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 것을 느리게나마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저는 제가 정말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귀하에게는 그래서 많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씁니다.

    그러고보니 수신인에 적은 진주너울이라는 말이 신기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별 것은 아니고, 파도가 치는 것을 보고 있자면 파란색은 짙고 깊은데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게 꼭 진주 구슬이 튀어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요. 조금 더 어릴적의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바다에 그런 파도가 치는 모습은 귀하의 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귀하의 머리색도 짙은 푸른색이고, 진주 장식이 뿔과 머리카락 사이에서 흔들리는 걸 볼 때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닮아간다는 모양이니 귀하께서도 그러한 것이겠지요. 음, 적고보니까 고민이네. 그럼 난 뭘 닮아가고 있는거려나. 일리야라면 알 수 있으려나?

    귀하께 보내는 선물은 매번 그렇지만 파란색이나 하얀색이나, 혹은 바다를 떠올리게 되는 것을 보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뻐해주시면 좋을텐데요. 잡화점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작은 병 안에 배 모형을 집어넣어 실제 바다에 띄워진 배처럼 흔들리게끔 파란 물을 채운 장식품도 있었는데... 귀하께서 이 장식품을 좋아하실지는 몰라도 제게는 좀 별로인 것 같아서요. 바다는 언제나 넓고, 설령 조각나더라도 이런 작은 병 안에 들어간다면 더이상 바다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제 마음대로 골라서 보냅니다. 창문의 커튼이나 침대의 캐노피로 달 수 있는 얇고 긴 파란색 천입니다. 특이하게 길이가 서로 다른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아랫단이 하얀 물이 들어있어서요. 창가에 걸어두면 방안으로 파도가 밀려드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골랐습니다. 선물은 매번 고르는데도 어쩐지 센스가 발전하지 않는 기분이라 슬프네...

    겨울에 여행을 할 때면 느끼는 거지만 겨울바다는 정말 춥더군요. 어디에 계시건, 혹은 바닷가에 계시다면 더더욱 건강에 주의하세요.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은, 답장 주시지 않아도 개학 이후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천계, 인간계로 가는 배편을 기다리는 선착장에서
    플로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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