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향기가 나는 편지, 나나 테스카에게.

(*해당 편지는 플로렌시오가 16살 겨울방학에 보낸 편지입니다. 답장은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고, 안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와 선물을 받아서 임의로 처분하셨다고 해도 괜찮으며 아예 안 읽었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 거다~ 에 대한 기록로그에 가까우므로 편지를 받은 이후의 부분은 완전히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날조 환영하며 17세 이후에 해당 편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내용은 뭐든 맞춰드립니다.)

(*중간중간의 옅은 글씨는 실제로도 좀 흐릿하게 쓴 것이 맞으며, 더러는 지웠거나(취소선)한 흔적이 보이는 글줄입니다.)

(*나나에게 보낸 편지는 레몬 향기가 나는 약간 어두운 초록색 편지지입니다. 편지봉투도 같은 디자인입니다.)

(*나나에게 동봉한 선물은 '요정계 수호목의 나뭇잎 모양으로 만든 책갈피'입니다. 나무 향기가 나며 잎맥이 살아있는 것만 같은 책갈피입니다. 다만 촉감까지 재현되지는 않았는데, 그러면 진짜 잎사귀와 구분할 수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가 존재하는 물건입니다.)

 

레모네이드가 아니라 레모네이드 가게 주인인 나나 테스카 귀하.

 

솔직히 처음에는 레몬을 씻는다고 하셨다가 본인이 흠뻑 젖어서 돌아오시는 것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그런가? 나야말로 완전 무인으로 영업한 셈인데 내가 더 성의없이 날로 먹었나? 그래도 부스에 별 문제 없이 성황리에 영업을 종료하시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귀하의 부스에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레모네이드 한 잔 얻어마실 수 있을까요? 보답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직접 구운 쿠키라도 좀 나눠드리겠습니다. 아마 맛은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요.

무투회 때 저는 급한 일로 나가봐야했던지라 불참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귀하께서 아카데미 4천왕 최후의 4인 중 하나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싸우는 것에도 마음가짐이나 재능 같은 것이 중요한가보다, 하고 내심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게는 그럴 이유도 각오도 없어서 대련장과는 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거든요. 나중에 대련할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한 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살살 부탁드립니다.

수확제 때 언뜻언뜻 귀하께서 부모님과 함께 계시는 모습을 본 것 같았는데, 부모님께서 귀하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보는 제가 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거든요. 그리고 귀하는 역시 어머님 쪽을 좀 더 많이 닮으신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건 제 기준의 생각이니 귀하의 생각은 다르실 수도 있지만요.

지금 저는 마계를 여행중입니다. 마계는 이전에 이상현상을 해결-솔직히 지금은, 그 때 한 건 그냥 현장학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하러 왔을 때도 한 생각이지만, 너무 더워요. 솔직히 악마들은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사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이너스가 다른 곳에서는 쉽게 추위를 타는걸지도요. 그나마 저는 날개가 없어서 그 부분만큼의 더위는 덜어낸 셈 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도 이상현상에 휘말린 마을이 몇 개 있었습니다. 마침 스텔라의 증표를 꺼내둔 채로 여행하고 있을 때라 복구 작업에 한 손 보태게 되었지요. 그 때 피해를 입었던 마을 중 하나에서 본인들 마을 출신의 스텔라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스텔라가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어느 노부부의 손자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저는 제가 자란 마을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세상에는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해도 한 아이가 자라나서 스텔라가 되었는데도 그 마을에서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이 '누구 댁의 손주' 정도로 칭해지는 건 좀 우습지 않나요? 그 아이에게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닐텐데요.

귀하께서도 제 반발심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솔직히 그 자리에서 표정 안 구긴 것만 해도 난 할 몫을 다 했다고 봐. 무슨 애 이름을 기억도 못해서. 우리 마을은 아이가 있는 집도 전부 이름 불러줬거든? 보호자든 아이든 관계 없이 다 이름 불렀다고. 나나도 이 마을 근처에 가지 마. 진짜 이상한 곳이야. 일부러 그 마을 근처의 소인이 찍히도록 해서 편지를 보내.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마계의 물건을 선물용으로 고르는 게 괜스레 꺼림칙해져서 이전에 지나왔던 요정계에서 사두었던 것을 함께 첨부해서 보냅니다. 수호목의 나뭇잎을 흉내내서 만든 책갈피라더군요. 잎맥의 모양새도 살아있지만, 코끝에 가져다대면 깊은 숲의 향기가 난다고 하여 고른 선물입니다. 부디 마음에 드시면 좋겠습니다.

겨울은 아직 멀고 깊어 봄이 오려면 멀었으나,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집니다.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은, 답장 주시지 않아도 개학 이후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마계,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와 함께
플로렌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