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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색 눈꽃이 그려진 편지, 선셋 미뉴엣에게.
    플로렌시오 로그/16살이 16살에게. 2023. 9. 9. 20:27

    (*해당 편지는 플로렌시오가 16살 겨울방학에 보낸 편지입니다. 답장은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고, 안 주셨다고 날조하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와 선물을 받아서 임의로 처분하셨다고 해도 괜찮으며 아예 안 읽었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 거다~ 에 대한 기록로그에 가까우므로 편지를 받은 이후의 부분은 완전히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날조 환영하며 17세 이후에 해당 편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내용은 뭐든 맞춰드립니다.)

    (*중간중간의 옅은 글씨는 실제로도 좀 흐릿하게 쓴 것이 맞으며, 더러는 지웠거나(취소선)한 흔적이 보이는 글줄입니다.)

    (*선셋에게 보낸 편지는 하늘색 눈꽃이 그려진 새하얀 편지지입니다. 편지봉투도 같은 디자인입니다.)

    (*선셋에게 동봉한 선물은 '수정파편을 다듬어 꿴 팔찌'입니다. 동그란 구슬 모양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파편 모양을 그대로 살려 가공한 것이 특징입니다.)

     

     

    멋진 무대를 보여주셨던, 선셋 미뉴엣 귀하.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펜을 듭니다. 귀하께서 연기하셨던 <울새와 천칭> 잘 보았습니다. 과연 화제가 될만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극단에 많이 다니긴 했지만 극단에서 제일 자주 올라오고, 또 그만큼 안전한 극은 영웅서사시나 불타는 정열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다만, 조금 걱정되는 것은 귀하의 평판에 해가 갈만한 배역이지는 않았나 싶은 것입니다. 극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요. 귀하도 저도 똑같이 천사이지만, 천사들에게 신앙은 중요한 요소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름에 완고해지는 특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근데 솔직히 걱정도 좀 무의미한가, 싶은게, 선셋은 그런 거 신경 안 쓸테고... 그런 사람들보다야 선셋이 더 강할테니까. 외적인 힘이든, 내적인 마음이든 말이야.

    하지만 이 편지는 이베르티 역을 맡으신 선셋 미뉴엣 양이 아니라 아카데미 동기인 선셋에게 보내는 것이니까요. 어떤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개학 이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도 극을 본 직후에 남는 감상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몇 줄 정도만 정서해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귀하께서, 아니 '이베르티'가 출연하였던 것은 3막 중 1막 뿐이었으나 그의 영향은 남은 극 내내 지속된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장면에서는 영엉 퇴장하였으나 극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다른 극에서도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파격적인 내용의 극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이베르티는 마녀로 심판을 받기 전 저주를 남기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누구도 여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끝없이 의심하게 되리라.'

    극에서는 그것이 마녀의 저주로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제이겠지요. 저도 천사이고, 부족하나마 신전에도 오래 다녔으며 여신님에 대한 신앙을 어느 정도는 간직하고 있는 편이지만 여신님의 목소리를 늘 듣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경전에 적혀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실천하는 수 밖에요. 하지만 어릴적에는 여신님의 목소리에 정말로 실체가 있는 줄 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른들께서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여신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구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경험이, 그리고 아카데미에서의 일들이 제 생각을 바뀌게 해주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정서하고, 또 정서한 끝에 남기기에는 굉장히 불경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여신님의 목소리라는 건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여신님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다채로워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고요. 상인에게는 상인만의 여신님이,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만의 여신님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가끔, 이루기에 어려워보이는 일과 주어지는 시련에 대해서 '여신님의 목소리'라는 말을 빌어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여신님의 목소리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겠고, 동시에 그 바깥에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선물을 고르려다가 무심코 경전을 집을 뻔 했습니다. 안 샀으니까 걱정마세요. 이런 이야기를 편지에 쓰다보니 자꾸 경전으로 손이 가는 바람에 말이죠. 그 덕분인지 다른 선물을 고르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잡화점에서 쫓겨났었습니다.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극에 지나치게 몰입한 관객의 사례가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말고. 동봉하는 선물은 자잘한 수정을 깎아서 꿴 팔찌입니다. 수정파편을 그대로 가공한거라 모서리만 날카롭지 않게 다듬었을 뿐이고 대부분 모양을 살린 세공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냥 동그란 수정보단 개성이 있어보이기도 하고, 들어서 빛에 비춰봤을 때 빛이 여러방향으로 이지러지는 게 한낮에 방에 걸어둔 모빌이 반짝이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드실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귀하께서도 저도 추위에는 강하기는 하지만 아직 겨울이 깊고, 이상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으니 건강 및 안전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은, 답장 주시지 않아도 개학 이후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인간계, 어느 소극장 앞의 벤치에서
    플로렌시오

     

    P.S. 이 편지 내용은 에녹에게는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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